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남대총 남분 금반지 (문단 편집) == 내용 == 지름 1.8~2.1cm. [[경상북도]] [[경주시]] 황남동의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[[신라]]시대 금반지들로,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~5세기 초반(서기 300~400년대 사이)로 추정되고 있다.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[[황남대총 북분 금관]], [[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]], [[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]], [[황남대총 북분 유리잔]], [[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]], [[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]], [[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]], [[황남대총 북분 은잔]], [[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]], [[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]], [[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]], [[황남대총 남분 은관]], [[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]] 등 7만여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. 당시 [[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|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반지 19점이 출토]]되었고, 남분에서는 18점의 금반지가 출토되었는데, 모두 껴묻거리 상자나 넛널 상부에서 출토되었다. 남분의 것은 북분의 것과는 약간 양식이 다른데, 밋밋한 형식의 북분 금반지와는 달리 남분 금반지는 반지의 앞면을 [[마름모]]꼴로 만든 후 그 표면에 [[꽃잎]]모양으로 금알갱이를 붙여 장식하였으며 그 사이에 작은 [[유리]]구슬이나 [[보석]]을 끼워 장식해놓았다. [[신라]]는 삼국 중 유일하게 반지 문화가 성행하였던 국가로, [[고구려]]의 경우 안학궁지 제2호분에서 청동제 반지가 출토된 적이 있으나 유물이 많지 않고 형태도 조잡하며, [[백제]] 역시 각종 호화스러운 유물이 출토된 [[무령왕릉]]에서조차 반지는 전혀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거의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.[[https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556521&cid=46671&categoryId=46671|한국민족문화대백과 : 반지]] 두 국가 모두 반지 유물, 특히 금반지가 발견된 경우는 고구려는 총 2점, 백제는 공주읍 우금리 고분에서 단 1점이 나왔을 뿐이다. 반면에 신라는 고분을 하나 조사할 때마다 금반지들이 쏟아지는데, 특히 이 황남대총 남분 금반지의 경우 함께 출토된 [[금방울]]과 함께 신라의 누금세공품 중에서 매우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높다. 지금으로부터 1,600여년 전 신라에서 만들어진 금반지들로, 함께 발견된 [[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]]와 함께 오직 신라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정교한 황금반지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이다.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. [[분류:신라의 금제유물]] [[분류: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]] [[분류:경주시의 문화재]] [[분류:황남대총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